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광법사 해탈문앞의 홍가사에 미리를 기른 북한 스님들
시대가 변하면서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남북한간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감에 따라 북한의 불교계를 비롯한 기독교, 천도교 등 각종 종교 단체가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홀동을 재개하였다. 북한은 남한의 종교인들과 함께하는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남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비난성명과 연대를 강조하였다. “북의 사회주의 력량과 남의 애국적민주주의 력량의 대련합으로 자주적 통일운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에서는 통치이념으로 주체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사회주의화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종교는 북한 사회가 요구하는 존재의 양태로 변화되어 갔다. 북한은 1972년 5월 자주•평화통일•민족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공포한 후 연이어 남북간에 「7.4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북한 사회에서는 반종교 선전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해방전후의 통합전선 형태가 아닌 새로운 구조의 통일전선이 강조되었다. 같은 해 12월 27일에는 1948년 제정한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으로 다시 제정했다. 1936년 소련이 최초로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한 이후 북한도 강력한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간 것이다. 또한 개정헌법에서는 내각을 폐지하고 ‘주석제’를 신설했다.
주석제는 주체사상의 유일 사상화 사업으로 북한의 절대 권위를 일컫는 법적 표현이다. 이에 1974년 2월 마침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온 사회주의 주체사상화」와 「유일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선포되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공식화 되었다.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인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핵심인 주체사상의 정립으로 북한 사회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고전적 정의와 함께 여러 시각으로 비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개정된 헌법 제 52조에서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 함으로써 법적으로도 종교에 대해 대중적이고 논리적인 비판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담아 출판된 책들은 김일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의 본질과 맹독성’을 파악하여 대증적으로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76년 출판된 최봉익의 『봉건시기 우리나라에서의 종교철학의 전파와 그 해독성』이라는 책은 불교를 “력사적인 근로인민대중을 억압 착취하고 기만하기 위한 착취계급들의 사상적 도구로 복무하여 왔다.”는 점을 분석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전통적 종교비판의 궤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1978년 김명호가 쓴 『미제가 남조선에 퍼뜨리고 있는 부르조아 인생관의 반동적 본질』이란 책은 기독교를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고 귀중한 존재인 인간을 철두철미 신에게 예속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한 만큼 전통적으로 종교비판에 출실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반동성과 맹독성은 “근로인민대중에게노예적 굴종으로 일관된 그릇된 삶의 태도를 설교함으로써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을 위한 혁명적 투쟁에 힘차게 떨쳐나서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는 시각으로 분석하여 종교를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반종교 선전이 심화됨에도 북한의 종교는 1972년을 분기점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 196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신종교정책이 점진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에 설립된 불학원의 기능과 같은 목적으로 1972년 ‘평양신학원’이 다시 개설되어 교회조직의 유지를 우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이해 7월 7일 북한의 종교로서는 전쟁이후 최초로 천도교 청우당 중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민족적 대 단결을 위한 남북 정당과의 다무적 협상을 하자”는 천도교 청우당 박신덕 중앙당 위원장의 담화 발표로 그 활동은 재개되었다.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광법사 해탈문앞의 홍가사에 미리를 기른 북한 스님들
시대가 변하면서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남북한간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감에 따라 북한의 불교계를 비롯한 기독교, 천도교 등 각종 종교 단체가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홀동을 재개하였다. 북한은 남한의 종교인들과 함께하는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남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비난성명과 연대를 강조하였다. “북의 사회주의 력량과 남의 애국적민주주의 력량의 대련합으로 자주적 통일운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에서는 통치이념으로 주체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사회주의화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종교는 북한 사회가 요구하는 존재의 양태로 변화되어 갔다. 북한은 1972년 5월 자주•평화통일•민족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공포한 후 연이어 남북간에 「7.4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북한 사회에서는 반종교 선전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해방전후의 통합전선 형태가 아닌 새로운 구조의 통일전선이 강조되었다. 같은 해 12월 27일에는 1948년 제정한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으로 다시 제정했다. 1936년 소련이 최초로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한 이후 북한도 강력한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간 것이다. 또한 개정헌법에서는 내각을 폐지하고 ‘주석제’를 신설했다.
주석제는 주체사상의 유일 사상화 사업으로 북한의 절대 권위를 일컫는 법적 표현이다. 이에 1974년 2월 마침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온 사회주의 주체사상화」와 「유일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선포되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공식화 되었다.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인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핵심인 주체사상의 정립으로 북한 사회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고전적 정의와 함께 여러 시각으로 비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개정된 헌법 제 52조에서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 함으로써 법적으로도 종교에 대해 대중적이고 논리적인 비판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담아 출판된 책들은 김일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의 본질과 맹독성’을 파악하여 대증적으로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76년 출판된 최봉익의 『봉건시기 우리나라에서의 종교철학의 전파와 그 해독성』이라는 책은 불교를 “력사적인 근로인민대중을 억압 착취하고 기만하기 위한 착취계급들의 사상적 도구로 복무하여 왔다.”는 점을 분석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전통적 종교비판의 궤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1978년 김명호가 쓴 『미제가 남조선에 퍼뜨리고 있는 부르조아 인생관의 반동적 본질』이란 책은 기독교를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고 귀중한 존재인 인간을 철두철미 신에게 예속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한 만큼 전통적으로 종교비판에 출실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반동성과 맹독성은 “근로인민대중에게노예적 굴종으로 일관된 그릇된 삶의 태도를 설교함으로써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을 위한 혁명적 투쟁에 힘차게 떨쳐나서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는 시각으로 분석하여 종교를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반종교 선전이 심화됨에도 북한의 종교는 1972년을 분기점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 196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신종교정책이 점진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에 설립된 불학원의 기능과 같은 목적으로 1972년 ‘평양신학원’이 다시 개설되어 교회조직의 유지를 우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이해 7월 7일 북한의 종교로서는 전쟁이후 최초로 천도교 청우당 중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민족적 대 단결을 위한 남북 정당과의 다무적 협상을 하자”는 천도교 청우당 박신덕 중앙당 위원장의 담화 발표로 그 활동은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