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강좌

불교대학

주체사상 확립시기의 북한 종교 : 한국전쟁이후 ~ 1970년대 초반

평불협
2024-04-01
조회수 33

   

 북한의 불교학원이 있는 량강도 삼수군 관평리 성거산(聖居山)의 중흥사

전쟁으로 남한의 반제·반봉건 혁명을 시도했으나 북한이 이에 실패하면서 전쟁의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하는 한편, 분단의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며 강화시켜 나갈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이 1958년 10월에 북한에서 완전철수하면서부터 냉전시대가 본격화 한다.

김일성은 196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반둥회의 10돌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관하여」라는 강연을 통해 조선노동당의 노선은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라고 규정하면서 그 요체는 ‘주체사상’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김일성의 행보는 중국과 소련 사이에 분쟁이 심화되던 상황 속에서 등거리 외교의 자주노선을 천명한 것이다.

김일성이 공표한 주체사상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1967년에 기존의 사상·문화 담당 간부들의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한 후, 김일성주의로서의 주체사상을 옹립하기 위해 기존의 문화전통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 작업을 단행하게 했다. 이 상황에서 국방 4대군사노선과 함께 3대 혁명역량 강화방침을 결정하여 김일성 중심으로 유일 지도체제를 확고히 하고, 북한만의 사회주의를 구축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북한식 문화혁명’은 1967년에 시작되었고, 북한 사회의 종교에 대한 견제 혹은 탄압이 한층 강화되었다.

북한은 통치철학인 주체사상의 전 인민화와 사회화를 통해 1967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틀이 본 궤도로 진입하자, 북한에서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종교의 생존 가능한 영역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사회주의 정착 과정 속에서 기존의 북한 종교가 암흑기를 맞이한다.

사실 북한 종교의 암흑기는 북한이 당 차원에서 1958년 12월부터 1960년대 말까지 ‘중앙당 집중지도 사업’으로 사상 검토와 성분 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주민들에 대한 계급성과 당성 조사 사업이 종교탄압을 목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종교인들이 적대계층으로 분류됨에 따라 북한의 종교와 종교인은 설 자리를 잃었다.

또한 북한은 ‘주민 재등록사업’을 1966년 4월부터 1년동안 시행한 결과에 따라 1967년 4월부터 1970년 6월까지 2년에 걸쳐 전 주민을 핵심·동요·적대 등 세 개의 계층 51개 부류로 구분했다.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미신숭배자 29, 천도교 32, 기독교 37, 불교 38, 천주교 39, 유교 40위 등이 하위계층으로 정해져 북한 체제 내에서의 감시와 불이익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인들 가운데는 애국열사 유가족으로 평가되어 핵심계층에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그들조차 해방이전의 신앙생활과 종교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북한은 종교를 봉건시대처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이용했고, 믹구을 비롯한 서구 강대국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도구로 종교를 이용했다는 판단아래, 종교인에 대한 인간 개조 사업을 통해 사회주의의 인민으로 통합시켜 왔다. 이 시도는 ‘교양 개조’란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성직자는 종교를 버리거나 숙청되고 승려는 환속해야 하는 등 북한 종교의 존재기반을 완전히 잃게 한 교양개조의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낡은 사상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과오를 범할 수 있으며 결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낡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버리는 것은 우리 당의 방침이 아닙니다. 우리 당은 시종일관 낡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꾸준히 교양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하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교양 개조된 북한 종교인들의 각 종교 교단과 천도교 청우당 같은 정당들로 1961년 5월 드디어 김일성은 북한 내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각 부문의 인사들을 포함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며, 적극 참여함으로써 북한 사회에서 공적인 단체로 지위를 획득했다. 이것은 바로 북한의 신종교정책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북한에서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자심감에 기초하여 종교가 소멸된다는 확신아래 제한된 수준에서 현실의 종교를 인정하는 신종교 정책을 추진한 것이었다.

더욱이 북한 정권이 인간개조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통일전선에서의 종교인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968년 4월부터 일정기간 노동당 정치국은 ‘풀어주는 사업’을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그 당시까지 비공식적 종교행위를 계속하던 60세 이상의 노인층을 대상으로 종교행위는 철저하게 금지하였지만, 예배와 같은 종교의식은 허용하였다. 특히 조선불교도연맹은 해방이후 처음으로 1965년에 승려교육과 양성을 위한 기관으로 3년제의 ‘불교학원’을 량강도 삼수군 중흥사에 설립하였다. 불학원은 북한 종교사에서 비교적 앞선 시기에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체제에서도 천년고찰 관리, 불교문화재 관리, 불교서적 번역 등전문적인 불교 승려의 기능과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북한 종교의 암흑기에는 기독교와 미국을 동일 범죄자로 몰았다. “선교사라는 이름을 걸고 정탐행위를 일삼지 않은 놈이란 하나도 없다. 선교사의 탈을 쓴 제국주의 정탐배들의 간첩 모략행위는 일찍이 학교, 병원 등을 설치해 놓고 조선 사람에게 숭미사상을 불어넣는 데 광분하였다.”고 평가할 만큼,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또한 김일성은 1968년 3월 교육부문 일꾼들에게 “옛날의 책들과 유물들을 옳게 평가하여 잘 처리하여야 한다.”고 하고, “불교, 예수교 같은 종교와 불교 문화 및 유교 문화도 옳게 평가하여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종교전통과 관련된 기존의 입장에 대한 비판도 함께 전개되었다.

이와같이 이 시기에 북한사회에서 종교를 부정하고 존립기반을 무너뜨리게 한 것은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강압책이라기보다 북한 사회의 사회주의화라는 더 큰 목표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에는 휴전 뒤 국토복구와 사회안정의 회복 등 조치원리의ㅣ 필요성이 부각됨으로써 북한 사람들에게 종교는 필요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릴르 일본의 속박에으로부터 구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굶주렸을 때 한 조각의 빵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주석님이 하셨습니다. (-) 우리는 주석님으로 족합니다.”라고 할 만큼 김일성 주석에 대한 믿은이 종교보다 더 크고 현실적으로 인민의 삶을 죄우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종교에 대한 물리적 탄압보다는 반종교 선전을 강화하여 신문이나 공연물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반종교 선전의 중요한 매체로 등장했다. 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을 비롯하여 『만주조선』등 신문들과 『천리마』, 『금수강산』 등의 잡지들은 「선교사는 미재국주의자의 앞잡이」, 「선교사의 탈을 쓴 점탐배」, 「숭미사상의 학습장」 등 선교사들의 반인륜적이고 제죽주의적 모습을 비판하는 글들을 실었다. 「혁명가극」, 「성황당」 등과 같은 공연물에서도 종교의 비과학적, 봉건적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일관되게 표현하였다.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