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종교계는 6.15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각계각층의 전쟁 동참에 대한 방송연설을 한 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950년 7월 15일 평양에서 불교신앙협회, 불교청년사, 여성불교도회 등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연합회의를 열고 1,300명이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또한 보현사와 석왕사 등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사찰과 신도들은 당시 화폐로 수 백만원의 성금과 1만 수 천 여점의 각종 위문품을 인민군에게 보내고 파괴된 도로와 교량, 철도복구에 참가했다고 한다.
기독교계는 1950년 8월 5일에 평양 서문밖에 위치한 교회에서 각 교단의 대표와 신자가 개최한 ‘평양시 교역자 궐기대회’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범죄적 죄악”을 규탄했으며 이를 여러 날에 걸쳐 다른 장소에서규탄기도회, 궐기대회 등을 열었다. 천도교의 최고지도자였던 최동오는 남하했던 인민군을 따라 자진 월북했다.
3년동안의 6.25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양쪽에 500만명도 넘는 사상자를 내고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 시켰다. 한국전쟁은 민족 내부의 전쟁이면서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일어난 전쟁, 그리고 마르크시즘과 기독교라는 보편적 신앙체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개입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북한에서의 집단적개심은 대외적으로는 ‘남조선 혁명’, 즉 통일 사명감과 결부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주체’를 위한 민족감정과 결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의 적개심은 반공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국정지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존 질서를 의문시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갈등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로 나타났다.
모든 민족 구성원의 사회적 기반과 관계없이 개인을 실존적 상황에 처하게 한 전쟁의 체험은 전후 남북한의 실질적인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반공적 국가체계와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적인 신앙체계에 의존하도록 하는 한편으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이해에 의해서 단일민족이란 운명공동체도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은 보여주었다. 이런 전쟁은 1953년까지 지속되다가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며 드디어 끝을 맺었으며, 남과 북의 각기 사회에서는 피난민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하면서 기존 사회계층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했다.
북한의 종교계는 6.15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각계각층의 전쟁 동참에 대한 방송연설을 한 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950년 7월 15일 평양에서 불교신앙협회, 불교청년사, 여성불교도회 등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연합회의를 열고 1,300명이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또한 보현사와 석왕사 등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사찰과 신도들은 당시 화폐로 수 백만원의 성금과 1만 수 천 여점의 각종 위문품을 인민군에게 보내고 파괴된 도로와 교량, 철도복구에 참가했다고 한다.
기독교계는 1950년 8월 5일에 평양 서문밖에 위치한 교회에서 각 교단의 대표와 신자가 개최한 ‘평양시 교역자 궐기대회’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범죄적 죄악”을 규탄했으며 이를 여러 날에 걸쳐 다른 장소에서규탄기도회, 궐기대회 등을 열었다. 천도교의 최고지도자였던 최동오는 남하했던 인민군을 따라 자진 월북했다.
3년동안의 6.25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양쪽에 500만명도 넘는 사상자를 내고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 시켰다. 한국전쟁은 민족 내부의 전쟁이면서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일어난 전쟁, 그리고 마르크시즘과 기독교라는 보편적 신앙체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개입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북한에서의 집단적개심은 대외적으로는 ‘남조선 혁명’, 즉 통일 사명감과 결부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주체’를 위한 민족감정과 결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의 적개심은 반공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국정지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존 질서를 의문시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갈등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로 나타났다.
모든 민족 구성원의 사회적 기반과 관계없이 개인을 실존적 상황에 처하게 한 전쟁의 체험은 전후 남북한의 실질적인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반공적 국가체계와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적인 신앙체계에 의존하도록 하는 한편으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이해에 의해서 단일민족이란 운명공동체도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은 보여주었다. 이런 전쟁은 1953년까지 지속되다가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며 드디어 끝을 맺었으며, 남과 북의 각기 사회에서는 피난민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하면서 기존 사회계층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