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청년은 만해를 배우라 -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3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입니다. 그 첫 째 날인 3월 1일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1919년 기미년에 일어났던 거대한 물결인 3.1독립만세시위 이지요. 우리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민족전체가 참여했던 3.1독립만세운동입니다. 이 인족대표 33인의 구성은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 인사 16명, 손병희를 포함한 천도교 인사 15명 그리고 불교 계의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 이렇게 33인입니다. 곽종석(郭鍾錫), 김창숙(金昌淑)등 유림들도 참여하기로 했으나 연락이 늦어져 서명하지는 못지만 유림 137인이 서명한 독립탄원서를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공관에 보냈으며 국내 각 향교에도 보냈습니다. 이것이 파리장서사건 또는 제1차 유림단사건입니다.
독립선언서는 알려진 바와 같이 최남선이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공약삼장을 만해스님이 작성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의 방법과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지요.
일제가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의 종파에 합쳐, 통제하고 관리하여 민족불교를 말살하려 하자이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저항하여 만해스님이 주축이 되어 임제종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만해스님의 항일독립운동의 표면화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민족의 자존과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허상을 비판하며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학생들과 각 지방학림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만해스님의 항일정신은 심우장을 지를 때 밝고 따뜻한 남향을 마다하고 총독부와는 정 반대방향인 북향으로 짓게 할 만큼 투철했습니다.
스님은 산중불교에서 사회불교로, 승려중심의 불교에서 민중불교로의 개혁과 승려교육의 개혁등 불교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사상은 <불교유신론>, <고려대장경>을 섭렵하여 <불교대전>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십현담주해>, <불교와 고려제왕>등의 저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문인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님의 침묵> 이라는 시집이 남아 있습니다. 1918년 창간한 최초의 불교 잡지 <유심> 창간호에 발표한 시가 <님의 침묵>입니다.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 <흑풍>, <후회>, <박명>薄命> 등과,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문학계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업적을 일찍이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으니 조선청년은 만해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북에서도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나 종교인을 인정하지 않던 북에서 소설 <임꺽정>을 지은 작가 홍명희도 “조선 청년이여!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명을 아는 것 보다 낫다”고 평가했습니다.
3.1절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며 자랑스러운 불교의 거묵이셨던 만해 한용운 스님을 생각하며, 산중에서 나와 민중속에서 찬란하게 피어나는 불교를 기대해 봅니다..
2024년 3월 1일
-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조실 중화 법타 스님
조선청년은 만해를 배우라 -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3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입니다. 그 첫 째 날인 3월 1일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1919년 기미년에 일어났던 거대한 물결인 3.1독립만세시위 이지요. 우리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민족전체가 참여했던 3.1독립만세운동입니다. 이 인족대표 33인의 구성은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 인사 16명, 손병희를 포함한 천도교 인사 15명 그리고 불교 계의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 이렇게 33인입니다. 곽종석(郭鍾錫), 김창숙(金昌淑)등 유림들도 참여하기로 했으나 연락이 늦어져 서명하지는 못지만 유림 137인이 서명한 독립탄원서를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공관에 보냈으며 국내 각 향교에도 보냈습니다. 이것이 파리장서사건 또는 제1차 유림단사건입니다.
독립선언서는 알려진 바와 같이 최남선이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공약삼장을 만해스님이 작성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의 방법과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지요.
일제가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의 종파에 합쳐, 통제하고 관리하여 민족불교를 말살하려 하자이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저항하여 만해스님이 주축이 되어 임제종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만해스님의 항일독립운동의 표면화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민족의 자존과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허상을 비판하며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학생들과 각 지방학림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만해스님의 항일정신은 심우장을 지를 때 밝고 따뜻한 남향을 마다하고 총독부와는 정 반대방향인 북향으로 짓게 할 만큼 투철했습니다.
스님은 산중불교에서 사회불교로, 승려중심의 불교에서 민중불교로의 개혁과 승려교육의 개혁등 불교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사상은 <불교유신론>, <고려대장경>을 섭렵하여 <불교대전>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십현담주해>, <불교와 고려제왕>등의 저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문인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님의 침묵> 이라는 시집이 남아 있습니다. 1918년 창간한 최초의 불교 잡지 <유심> 창간호에 발표한 시가 <님의 침묵>입니다.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 <흑풍>, <후회>, <박명>薄命> 등과,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문학계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업적을 일찍이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으니 조선청년은 만해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북에서도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나 종교인을 인정하지 않던 북에서 소설 <임꺽정>을 지은 작가 홍명희도 “조선 청년이여!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명을 아는 것 보다 낫다”고 평가했습니다.
3.1절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며 자랑스러운 불교의 거묵이셨던 만해 한용운 스님을 생각하며, 산중에서 나와 민중속에서 찬란하게 피어나는 불교를 기대해 봅니다..
2024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