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

참다운 인생(人生)

세계 석학들의 종교관(2)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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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조실

평화불교협회 이사장 中和 법타 스님

양계초(梁啓超, 중국음 량치차오 : 1873년 ~ 1929년) 청말, 중화민국 초기의 계몽 사상가이며, 입헌파(立憲派) 정치인이고, 언론가, 개혁가, 철학가, 문학가, 사학가, 교육가이다. 중국에서 중화민족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한 사람으로 청말의 유학자 강유위(康有爲 중국발음 : 캉유웨이)의 뛰어난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중국 근대 개혁의 사상과 서양 근대 지식을 익힌 사람입니다. 캉유웨이와 함께 광서제(光緖帝)에게 보내는 상서를 함께 집필했고, 이것이 황제의 눈에 들어 결국 무술변법으로 이어졌으나 서태후 등 반개혁 세력에 의해 10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무술변법이란 1898년 광서제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일으킨 근대화(자강) 운동으로 무술변법(戊戌變法) 또는 변법자강운동이라고도 하고 (變法自彊運動) 100일 유신(維新)으리고도 하는 중국의 근대화 운동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갑신정변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결국 이 운동은 서태후의 후원을 받은 훈구세력의 쿠데타성공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량치차오는 <중국역사연구법>에서 <조선 반도의 문제는 기자(箕子)가 봉(封)을 받은 적이 있었더라도 그 이래로, 한, 수, 당 등 누차의 기복을 거친 것이 이미 3천 여 년이 지난 일이다. 광서제때 갑오전쟁(淸日戰爭의 중국식 표기)에서 이 문제는 해결에 실했다. 우리의 역사 범위에서 제외된다. 나중에 중국의 자손이 애써 해결할 일이 또한 이미 없다.> 고 했다.

◀ 양계초

이처럼 량치차오는 명망과 황제의 신임이 높았던 인물로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견해를 불교(佛敎)와 군치(群治 : 다스림, 정치) 관계에서 불교를 신앙(信仰)하게 된 6가지 조건과 기독교관(基督敎觀) 및 바른 신행(信行)에 대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조건은 첫째로 겸선(兼善)이고 독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만 옳은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독선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독선은 곧 독재를 부르게 되지요.

두 번째로는 불교가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기 대문아라고 했습니다. 입세(入世)의 반대개념이 염세(厭世)지요. 불교는 배우고 닦은 바를 세상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찰들이 세속을 떠난 산중에 있다고 해서 출세간(出世間)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배우고 닦기 위해서는 출세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세간에서 하는 것이고 사람들 틈에서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염불수행으로 삼매에 드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영불 자체는 타력같아 보이지만 일단 삼매에 들면 자력이 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세 번째로는 신앙은 무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고 세상도 유한하지만 믿음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 깊이와 높이는 측량할 길이 없지요. 학문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지요. 그렇게 끝이 없고 한정(限定)이 없기 때문에 믿어볼만 하고 가 볼만한 것 입니다. 만약 정해진 한계가 있다면 그것을 성취하거나 도달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허탈감이 따를 것입니다. 목표도 내가 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면 또 다른 목표가 나타나는 이것인 진정한 신앙의 길이 아닐까요? 사람은 모두 배고프니 않게 살림살이가 넉넉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림이 넉넉해 지면 편안해 지기를 바라고 편안해 지면 즉길 것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면 또 다른 모표를 찾게 됩니다. 불교는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불교는 평등이고 차별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첫 마디가 유아독존입니다. 모두가 다 같이 고귀한 존재라는 뜻이지요.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카스트제도가 엄격히 지켜지는 사회였지요. 인도를 지배한 아리아인들이 본래 인도의 토착민을 노예로 삼으면서 확립된 제도가 카스트 제도입니다. 이것을 깨뜨린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지요. 부처님의 평등사상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생명에까지 확장되었지요. 육식을 하지 말라는 것도 생명존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교는 타력이 아니라 자력이기 때문에 믿게 된다고 했지요. 자력에는 자기의 의지와 신념과 판단이 따릅니다. 타력종교는 단지 신에게 의지하고 믿고 복종하면 되기 때문에 모둔 것을 신에게 맡기고 의존해야 합니다. 생명끼지도 맡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또 무엇이고 내가 판단하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유일한 절대자 만이 옳고, 따라야 하고, 다른 모든 것은 악이며, 틀렸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독선이고 다툼과 갈등과 분규가 일어나며 극단론까지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믿음이 무조건이며, 강요 되지 않았음을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면서 올바른 불교의 신행(信行)도 이야기 했습니다. 알고 믿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불경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교의(敎義)에 이르기를 <부처님을 모르면서 스스로 부처를 믿는 다면 그 죄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 보다 더 심하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불교를 잘 압니까? 혹시 믿으면 극락간다고들 하니 믿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읽고 외우고 공부하십니까? 그저 절에 왔다갔다 하면서 불전놓고 절하고 복달라고 비는 분은 계시지 않겠지요. 믿음과 공부와 수행과 실천은 수레의 네 바퀴와도 같습니다. 오늘 부터라도 경저 한 구절이라고 명속하고 그 뜻을 헤아리며 실천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는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이다. 그런데 불교는 크게 왕성했고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그리스도교는 오직 미신을 위주로 하여 그 철학과 이론이 천박하기 때문에 중국의 지식인(士君子)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캉유웨이, 량치차오의 <중국학술사상 변천의 대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의 강대국은 기독교를 이용해서 낚시의 미끼로 삼았다. 고 <불교(佛敎)와 군치(群治)와의 관계>에서 말하며 국제정치가 종교를 역이용하여 무력진출의 근거로 삼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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