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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법회

행복선원

사람에게는 세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평불협
2023-12-29
조회수 133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4NzuU1jpLEU내 생일이 음력 4월 초 여드렛날입니다. 부처님 오신날과 같아요. 어릴 적에 무척 몸이 약했어요. 그래서 어머님께서 유독 나만 절에 등을 달아 주셨어요. 어머님 말씀이 “네가 몸이 약해서 건강하게 해 달라고 등을 달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나와 부처님과는 인연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중학교 다닐 무렵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분이 청주시립도서관에 근무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책을 접하기가 쉬웠어요. 그 때 청주시립도서관에서 처음 빌려서 본 책이 반야심경 강의라는 빨간 표지의 작은 책이었어요. 그 책의 내용이 아주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고 더 알고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일요일날 지금의 청주불교수도원이된 신묘화사를 찾아갔어요. 갔더니 많은 학생들이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어요. 그것이 어지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넋을 놓고 지켜보다가 끝나기 무섭게 한 학생을 잡고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스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느냐고요. 그 학생이 당시 그곳 학생회장이었어요. 지금도 교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뒤로 얼마나 열심히 그곳을 다니며 스님의 설법을 들었어요. 정말 열심히 다녔습니다. 세시쯤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입고 기다리다가 통행금지 해제 싸이렌이 울리면 아버님 자전거를 타고 절에 갔어요. 새벽예불에 참석하려고요. 그런데 대학교에 다니던 선배들을 따라 법주사로 수련회를 갔어요. 내가 아직 어리다고 못오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몰래 뒤쫓아 갔습니다.

스님과 대담을 할 때 같이 참석했습니다. 대학생 선배들과 함께 순서대로 이야기를 했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스님 저는 이제 청주에 가지 않고 절에 남아 스님이 되겠습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놀라시며 중도 무식하면 안되니 고등학교 졸업장 가지고 오라고 하셨어요. 방학 때에는 절에 와서 지내도 좋다고도 하셨고요. 바로 그분이 내 은사이신 추자 담자 스님이십니다.

고등학교 다닐 떼 스님이 청주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만사 제쳐두고 스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스님의 짐(보따리)를 들고 졸졸 따라 다녔어요. 그렇게 스님을 좋아하고 따랐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왜 그리도 시간이 더디게 갔는지요. 빨리 절에가서 살고싶은데 고등학교 3년은 너무 지루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다음날 새벽 주무시는 부모님을 깨워서 말씀드렸어요. 그 때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놈아 중되는게 그렇게 급해서 새벽같이 자는 사람 깨워서 이러느냐”고 하셨어요. 그렇게 법주사로 추담 큰스님을 찾아가서 출가했습니다.

내 은사스님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제자들에게 말입니다. 예불이 끝나면 세 가지를 항상 말씀하셨어요. 서로 존경해야 한다,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고, 상대를 이해하라, 상대를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조건 없는 자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연자비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조건없는 보시, 무주상 보시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세 가지 생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시간이 생명이라고 하셨어요. 우리의 목숨은 유한 하지 않습니까? 이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잘살고, 못살고, 이루고 못 이루고하는 것들이 결정되지요. 우리에게 유한하게 주어진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시간에 따라 생명도 스러져 가요.

둘째 정직은 생명이이다.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면 모든 것이 꼬이고 복잡해집니다. 정직하게 살고 정직하게 말하고 일하면 약간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어요.

셋째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정직하면 잘못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고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세가지 시간, 정직 용기는 살아갈수록 절절히 느껴져요. 이것은 우리스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말로 가장 쉽게 풀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일타스님과의 인연은 대학교 기술사 룸메이트였던 성진스님과의 인연으로 일타스님을 뵙게 되었어요. 성진스님과 함께 일타스님을 모시고 강원도 화지리 도피안사의 보살계에 갔었어요. 그렇게 일타스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1994년 7월 10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잡혀갔어요. 거기서 안양도소로 넘어갔을 때 일타스님께서 그곳을 국립선방으로 알고 열심히 참선하면서 성찰하라. 거기서 네가 네 것을 얻는 길이 바로 이것이라고 편지를 보내 주셨어요. 거기선 참선도하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은사스님께서 신흥사로 가시면서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대학을 보내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광주에 있는 원효사 주지를 했어요. 그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 현장을 보았어요. 조선대학교에 출강도 했고, 전남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하면서 불교신문사 부사장도 겸했습니다.

조선대학교 교수들이 좀더 탁마해서 교수가 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고, 광주사태로 받은 중격도 있고 해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미국에 가서 세계종교들 어떻게 지도자교육을 하는지를 연구해서 한국승려교육을 개혁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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